반둥회의 60주년 기념식
“일본은 앞선 대전(大戰)에 대해 깊은 반성을 한다.”
자카르타 AP 연합뉴스
앞줄에 北 김영남 위원장, 뒷줄에 황우여 부총리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22일 열린 ‘반둥회의 60주년 기념 정상회의’에 참석한 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 정상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앞줄 왼쪽 끝에 보이고, 조코 위도도(왼쪽 여섯 번째) 인도네시아 대통령 양 옆으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섰다. 반면 황우여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두 번째줄 오른쪽 끝에 서 있다.
자카르타 AP 연합뉴스
자카르타 AP 연합뉴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22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린 반둥회의 60주년 기념 ‘아시아·아프리카 정상회의’에서 한 연설에서 과거 전쟁에 대한 반성을 담았다. 그러나 ‘식민지 지배와 침략’, ‘사죄’는 언급하지 않았다. 앞선 대전도 제2차 세계대전을 말하는 것인지 미국과 전쟁을 한 태평양전쟁을 의미하는 것인지 명확히 하지 않았다. 반성은 했지만 진정성이 없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아베 총리는 연설을 통해 1955년의 반둥회의에서 확인된 10원칙 가운데 ‘침략, 무력행사에 의해 타국의 영토 보전과 정치적 독립을 침해하지 않는다’, ‘국제분쟁은 평화적인 수단으로 해결한다’는 두 가지 원칙을 강조한 뒤 “일본은 이 원칙을 과거 전쟁에 대한 깊은 반성과 함께 어떤 때라도 지켜나가는 국가일 것을 맹세했다”고 밝혔다.
아베 총리가 1995년 무라야마 담화 등에 명기됐던 ‘식민지 지배와 침략’ 표현 등을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8월 15일 발표할 ‘전후 70년 총리 담화’(아베 담화)에도 이런 표현들이 담기지 않을 가능성이 커졌다. 또 당장 오는 29일로 예정된 미국 상·하원 합동회의 연설에서도 침략과 식민지 지배 등에 대한 사과는 담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이 같은 태도로 일본의 역사인식이 10년 전보다 뒷걸음질 쳤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아베의 정치적 스승 격인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는 2005년 당시 반둥회의 50주년을 기념하는 정상회의에서 “식민지 지배와 침략이 아시아 국가들에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다”면서 “뼈저린 반성과 마음으로부터 사과한다”고 표현했다.
아베 총리는 “(역대 내각의 역사인식을) 계승한다고 한 이상 다시 한번 쓸 필요는 없다”거나 “더이상의 사죄가 왜 필요하냐”는 인식을 피력해왔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침략 전쟁에 대한 잘못을 구체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전후 ‘전범국가’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등 ‘전후체제로부터의 탈피’를 시도하려는 것으로 풀이된다.
당초 주변국들은 아베 총리가 태평양전쟁 전후로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일삼았던 아시아 국가들에 대해 반성과 함께 사죄의 뜻을 밝힐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태평양전쟁 당시 피해국이던 동남아 국가들이 최근 중국의 군사적 부상에 대한 경계로 일본의 재무장에 호의적으로 돌아선 데다 미국과의 군사동맹이 강화되고 있는 등 주변 환경이 아베 총리가 이 같은 입장을 고수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아베 정부의 퇴행적인 역사인식은 한국, 중국 등 주변국들과의 관계 정상화를 가로막는 최대 걸림돌이다. 반둥회의에 정부 대표로 참석한 황우여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아베 총리의 연설문에 “사죄의 표현이 없어 깊이 유감”이라며 “다가오는 미 의회 연설과 8·15 담화에는 올바른 역사인식이 반영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앞서 기조연설을 통해 황 부총리는 역사왜곡 행보를 이어가는 일본을 겨냥한 듯 “동북아에서 역사문제가 극복되지 못한 채 역사수정주의가 고개를 들고 있다. 이는 역내 국가 간 불신과 긴장을 유발하면서 화해와 협력을 저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사과’ 없는 아베 연설을 두고 일본 내에서도 비판이 나왔다. 보수 성향 요미우리신문은 22일자 사설에서 “전후 일본은 침략이 잘못임을 인정한 데서 출발했다는 역사 인식을 빼고 70년을 총괄할 수는 없다”고 논평했다. 마이니치신문도 사설을 통해 “전후 70년 담화에 ‘침략’이나 ‘식민지 지배’라는 단어가 담기는지는 본질적인 문제이며 담화에 포함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도쿄 이석우 특파원 jun88@seoul.co.kr
2015-04-23 8면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