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가 패밀리 비즈니스로 전락… 아메리칸 드림은 없나
‘왕조’라는 단어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대통령을 선출한 미국과 어울리지 않는다. 미국은 신분이 아니라 재능과 노력으로 누구나 성공할 수 있는 ‘기회의 땅’으로 인식돼 왔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아메리칸 드림’은 허망한 꿈이 됐다. 왕국을 거부하고 공화국의 반석을 다진 미국에서도 개인의 ‘스펙’보다 ‘탯줄’이 더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어서다. 특히 미국 정치판은 이런 봉건적 특성을 두드러지게 보여 준다. 2016년 대선은 일찌감치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과 공화당의 젭 부시 전 플로리다 주지사의 맞대결 구도로 좁혀지고 있다.1980년대 후반부터 대선이 열릴 때마다 두 집안 사람들은 고정 출연 중이다. 알다시피 힐러리는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부인이고, 젭은 조지 H W 부시 전 대통령의 아들이자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의 동생이다. 숙명적 라이벌이 된 두 가문의 싸움이 여기서 그치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다. 2008년 어머니 대선 캠프에서 활동을 시작한 딸 첼시 클린턴에 대해 아버지 빌은 “대권에 도전한다면 적극 지원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젭 부시의 아들 조지 P 부시는 최근 텍사스주 국토부 장관 격인 ‘랜드 커미셔너’로 본격 정치 활동을 시작해 두 가문의 대결은 재연될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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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대권 도전이라는 진기록을 세운 부시 삼부자. 아버지 조지 H W 부시(왼쪽부터)와 형 조지 W 부시에 이어 백악관 입성을 노리는 차남 젭 부시. 젭의 아들 조지 P 부시(작은 사진)도 이들의 텃밭인 텍사스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해 벌써부터 공화당의 미래 주자로 꼽히고 있다(사진 왼쪽). 내년 대선에서 힐러리 클린턴(가운데)이 승리하면 미국 첫 여성 대통령에 미국 최초 부부 대통령 탄생이란 사상 초유의 역사가 새로 쓰인다. 남편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힐러리 캠프에서 정치 이력을 시작한 딸 첼시가 대권에 도전한다면 적극 지지하겠다고 밝혀 새로운 정치 왕조가 되고픈 야망을 드러냈다(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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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대선 판도를 뒤집을 다크호스가 출현하지 않는 이상 미국도 이런 멍에에서 자유로울 수만은 없다. 정치가 ‘패밀리 비즈니스’로 전락한 데에 미국 안팎에서 비판이 거세지고 있다. 최근 유력 잡지 이코노미스트는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미국을 ‘신귀족주의’ 사회라 칭하고 엘리티즘의 고착화가 이뤄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앞서 영국의 가디언은 3선 대통령을 금지하는 헌법까지 제정한 미국에서 ‘정치 왕조’(Political Dynasty)의 권좌 돌려 앉기에 대해서는 유독 무감각하다고 꼬집었다.
미국에서 정치 왕조는 사실 역사적으로 뿌리가 깊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8명의 대통령이 애덤스, 해리슨, 루스벨트, 부시 등 4개 가문에서 나왔다. 정치 왕조의 시초는 애덤스 집안이다. 2대 대통령 존 애덤스와 그의 장남 존 퀸시 애덤스가 6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사상 첫 부자(父子) 대통령이란 기록을 세웠지만, 둘 다 형편없는 리더십으로 최악의 대통령이란 불명예도 함께 얻었다. 루스벨트 가문도 직계는 아니지만 두 명의 대통령을 배출했다. 1901년 윌리엄 매킨지 대통령이 암살되자 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백악관의 주인이 됐다. 1932년에 12촌뻘인 친척 동생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대통령에 올랐다.
진정한 ‘정치 왕조’를 이룬 곳은 케네디가(家)다. 케네디 가문은 막대한 부를 활용해 정치를 ‘가업’으로 만든 최초의 집안이라 할 수 있다. 미 증권거래위원회(SEC) 초대 위원장과 영국 대사를 지낸 조지프 케네디 아래 4대를 거치며 정치판에 단단히 뿌리를 내렸다. 조지프는 네 명의 아들 가운데 장남을 대통령으로 키우려고 했으나 그가 29살에 2차대전에 나가 전사하는 바람에 계획을 바꿨다. 그는 차남인 존 F 케네디를 대통령으로 만들고, 셋째 로버트를 법무장관에, 막내 에드워드를 상원에 앉히는 데 성공했다.
2009년 에드워드가 세상을 뜨면서 케네디 가문 1세대의 정치 활동은 종말을 고했지만, 후손들의 활약은 여전하다. 에드워드의 아들 에드워드 케네디 주니어는 코네티컷주 상원의원, 둘째 아들 패트릭 케네디 2세는 연방 하원의원을 지냈다.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의 딸 캐럴라인 케네디는 현재 일본 주재 미국 대사로 활동 중이다. 아들인 존이 1999년 불의의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지 않았다면 아버지의 못다 한 꿈을 이뤘을 것이란 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로버트 케네디 전 법무장관의 큰딸인 캐슬린은 1995년부터 2003년까지 메릴랜드주 부주지사를, 아들 조지프는 6선 연방 하원의원을 지냈다. 손자인 조지프 케네디 3세는 2012년 매사추세츠주 하원의원에 당선돼 4대가 공직을 맡았다. 평론가들은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기점으로 후보자뿐 아니라 그의 배우자, 형제·자매까지도 관심을 두는 경향이 시작됐다고 얘기한다.
케네디가 다음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 명문가는 부시 집안이다. 1988년 백악관에 입성한 조지 H W 부시는 코네티컷주 연방 상원의원을 지낸 아버지 프레스콧 부시의 영향력을 물려받았다. 1992년 민주당의 빌 클린턴에게 패하면서 단임에 그쳤던 한은 2000~2008년 아들 조지 W 부시가 연이어 백악관을 차지하면서 풀렸다. 이제 차남 젭 부시가 세 번째 대통령 도전자로 의욕을 불태우고 있고, 손자 조지도 벌써 차기 주자로 거론되는 등 부시가는 3대에 걸쳐 워싱턴 정가를 지배하고 있다.
지난달 타계한 마리오 쿠오모 전 뉴욕 주지사도 ‘부자 지사’라는 진기록을 남겼다. 이탈리아 출신 식료품 가게 아들인 그는 주지사에 연거푸 세 번 선출됐다. 장남인 앤드루 쿠오모도 2010년 뉴욕 주지사에 처음 당선된 뒤 지난해 재선에 성공해 아버지의 연임 전통을 이었다. 그는 로버트 케네디 전 법무장관의 딸 케리 케네디와 결혼했다가 2003년 이혼했다.
이 밖에 최근 ‘대권 3수’ 포기를 선언한 공화당 밋 롬니의 아버지는 미시간 주지사를 지내고 1968년 공화당 대선 후보 경선까지 나섰던 조지 롬니다. 내년 대선에서 공화당 ‘잠룡’ 중 한 명인 랜드 폴 연방 상원의원(켄터키)의 부친은 1988년, 2008년, 2012년 세 차례나 대선 경쟁에 뛰어들었던 론 폴 전 하원의원이다. 미국인들이 정치 왕조에 집착하는 이유는 뭘까. 하버드대학의 바버라 켈러맨 교수는 “미국에서 정치 세습이 이뤄지는 데에는 셀러브리티(명사)에 대한 숭배와 선거제도 그리고 과거에 대한 향수가 복합적으로 작용한다”고 분석했다. 유럽의 왕족이나 귀족에 대한 은근한 열등감이 있는 미국인들은 명문가의 출현을 한편으론 반기기도 한다. 소수의 유권자에 의해 1차 선택을 받는 오픈프라이머리도 유명인에게 유리한 발판으로 작용한다. 정치 무관심도 정치 왕조 부흥에 한몫한다. 후보자의 정보가 없거나 알고 싶지 않을 때 익숙한 ‘라스트네임’(성)은 정치인에게 생명과 같은 즉각적인 인지도 제고 효과를 가져다준다.
●“권력 세습은 국가보다 집안 앞세워” 지적도
무엇보다 정치 왕조를 지탱하는 것은 돈이다. 기업들은 특히 미래 보장을 위해 아는 이름에 기꺼이 큰돈을 쾌척한다. 아직 판이 열리지 않았는데도 힐러리 캠프는 벌써 400만 달러나 끌어모았다.
CNN에 따르면 미국 상원의원 100명 가운데 가족 또는 친척이 공직 경험이 있는 사람이 3분의1가량 된다. 첫 정계 진출자가 쌓은 관계, 인맥 등은 한집안에서 제2, 제3의 정치인을 만드는 데 유리하게 작용한다는 걸 말해 준다. 소수 가문의 권력 분점은 미국 사회 특유의 다양성과 혁신을 저해하고 엘리트주의를 극대화한다는 비판이 제기돼 왔다.
지난해 LA타임스는 사설을 통해 아들 부시가 이라크전을 일으킨 이유가 아버지 부시의 복수를 위한 것이었다고 꼬집으며 대를 잇는 권력 세습은 국가보다 집안을 앞세우는 우를 범하기 쉽다고 지적했다. 부시는 이라크 침공을 앞두고 행한 연설에서 “이 자(사담 후세인)는 내 아버지를 죽이려 했다”고 대놓고 말해 미국민들을 아연실색하게 했다. 이후 미국에 대한 안보 위협 증대와 이슬람국가(IS)의 급격한 부상은 이슬람권을 상대로 ‘패밀리 비즈니스’를 벌인 부시 전 대통령의 업보라는 비난이 설득력 있게 퍼지기도 했다.
박상숙 기자 alex@seoul.co.kr
2015-02-03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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