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우의 언파만파] 말을 만들어 가는 주체는 대중이다

[이경우의 언파만파] 말을 만들어 가는 주체는 대중이다

이경우 기자
입력 2020-12-06 20:44
수정 2020-12-07 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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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우 어문부 전문기자
이경우 어문부 전문기자
친구에게 물었다. “내후년은 몇 년도?” “무슨 말?” “내후년이 2022년이야, 2023년이야?” “내후년? 음, 2022년이지. 아냐?” “국어사전에 따르면 얘기가 달라지네. 어떤 국어사전을 찾아봐도 ‘내후년’은 ‘후년의 다음해’야. ‘후년’은 ‘올해의 다음다음 해’고. 그러니까 국어사전대로 쓰면 내후년은 2023년이 되는 거지.” “이런…. 잘못 알고 쓰고 있는 거야? 그렇더라도 내후년을 2023년으로 알라는 건 영 아닌 것 같은데.”

주위 스무 명에게 다시 물었다. 내후년이 2023년이라고 답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모두 ‘내후년은 2022년’이라고 했다. 국어사전의 뜻풀이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난 9월 취임 100일은 맞은 박병석 국회의장은 화상으로 진행된 기자간담회에서 “내후년 상반기 대통령 선거와 전국지방선거가 세 달 간격으로 열린다”고 말했다. 여기서 ‘내후년’은 2022년이다. 일상에서뿐만 아니라 공적인 자리에서도 내후년은 이처럼 내년의 다음해인 2022년의 의미로 쓰인다. 우리나라 달 탐사선이 2022년 발사되는데, 이 소식을 전하는 언론 매체들도 ‘내후년’이란다. 2022년 전기차의 성장이 가속화된다는 증권가 소식도, 전 세계에서 코로나19가 끝나는 건 2022년에나 가능하다는 소식도 ‘내후년’이라는 말로 전해진다. 내년 다음해는 ‘내후년’이 아니라 ‘후년’이고, 내후년은 3년 뒤라는 지적들은 무색하다. 이런 지적이나 국어사전의 뜻풀이에도 현실에선 ‘내년’ 다음해는 ‘후년’이 아니라 ‘내후년’이다. ‘후년’은 사라져 간다. 바뀌어야 하는 건 현실의 대중이 아니라 지적하는 쪽과 국어사전이다.

비슷한 예로 ‘한나절’도 있다. “그거 하려면 한나절은 걸려”라고 했을 때 대부분 ‘한나절’을 ‘하룻낮 전체’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한나절’은 ‘하룻낮의 반’이다. 하루 가운데 낮의 반 동안을 가리킨다. ‘반나절’은 ‘한나절의 반’이니까 하룻낮의 반에서 또 반으로 나눈 시간이 된다. 그러고 보면 하룻낮의 절반쯤을 뜻하는 ‘나절’이 ‘낮절’이었다고 볼 수 있다는 의견에 수긍이 간다. 여기서 ‘절’은 ‘절반’의 ‘절’이다. ‘낮의 반’이란 의식이 사라지며 사람들이 ‘한나절’의 뜻을 바꿔 사용하는 게 현실이 됐고, 표준국어대사전의 ‘한나절’에는 ‘하룻낮 전체’라는 풀이도 실렸다.

일부가 생각하듯이 국어사전과 다르다고 틀린 건 아니다. 국어사전은 훌륭한 참고서일 뿐이다. 말의 뜻을 정하고 말을 새롭게 하거나 변화시키는 주체는 그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이다. 국어사전은 이 과정이 기록된 결과물이다.

wlee@seoul.co.kr

2020-12-07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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